27/09/2024
[아무튼, 미술관] 빛과소금 10월 호
어려서부터 나는 그림을 보고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 점점 그림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그림마다 다르게 표현된 작가의 의도를 그림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 나는 극히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른바 ‘그림 읽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러하다. 의대 본과시절 여름방학을 이용해 생애 첫 유럽배낭여행을 홀로 계획한 바가 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의대는 방학이라도 성적이 좋지 않아 재시험에 걸리면 방학을 통째로 날리게 된다. 그래서 이미 발권한 비행 스케줄을 놓치지 않으려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해서 재시험을 피한 무용담을 나는 보유하게 되었다.
당시에 대학생들은 여러 명이 팀을 이루거나 호텔을 지정을 여행사의 도움을 얻어 유럽여행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젊은 혈기였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여행안내책자와 유레일패스만 들고 혈혈단신 런던으로 날아갔다. 지금처럼 모바일을 이용한 인터넷은 상상도 못하던 느린 랜선의 초기 인터넷시대이었다. 만약 그러한 환경에서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맨땅에 헤딩하듯 여행을 떠나겠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상당수가 포기할 거라고 나는 장담한다. 숙소 예약 하나 없이 배낭 하나 달랑 들고 런던 히스로 공항으로 입국하여 숙소도 찾지 않고 처음 방문한 곳은 바로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내셔널 갤러리’이었다.
세계적인 명화로 전시 홀이 가득 차있던 미술관 안에서 핏기어린 젊은이에 불과했던 나는 대영제국의 유산인 예술작품 앞에서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책과 영상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생생한 현장에서 20대 초반의 청년인 나는 내셔널 갤러리, 대영박물관, 테이트 미술관 등을 둘러보며 인류문화유산인 서양미술사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뜰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의대 공부로 바빴지만 틈나는 대로 E.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전공서적처럼 읽어가며 미술사에 대한 뼈대를 이해하고 축적하려 노력했다. 미대생들과도 어느 정도 대화가 될 만큼 지식을 쌓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서양화에 담긴 성경과 신화의 알레고리를 파악한 이후부터는 미술관 관람은 나에게 영화나 뮤지컬 관람 이상으로 흥미를 주는 분야가 되었다. 장담하건대 이렇게 미술 중에서도 특히 명화에 대해 미리 공부를 하거나 배경지식을 쌓는 분들에게는 여행 중에 미술관을 감상하는 일은 맛집 기행보다 더 달콤한 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해외여행의 경우 며칠씩 그 도시의 미술관 안에서 시간을 보내라고 하여도 좋을 만큼 미술관 관람은 늘 손꼽아 기다려지는 코스가 되었다. 그 이후에도 여러번 반복해서 런던을 방문하면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수십 권의 미술책을 독파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바로 전 2019년 가족들과 함께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를 오랜만에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시간을 미술관 안에서 기쁨과 탐닉 사이에서 보내던 중 뜻하지 않게 나의 마음에 파고든 그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5장에 등장하는 ‘베데스다 연못’의 일화로 서지 못하는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께서 손을 내미시는 장면을 그린 ‘바르톨로메’가 17세기에 그린 작품이었다.
사실은 이 일화에 대해 나는 개인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과거 대학병원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진료를 앞두고 잠시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외래진료실에서 가졌는데 그 때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에서 서른여덟 해를 보낸 병자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QT를 마치며 주님께 기도하기를 제게 이러한 환우가 온다면 주의 뜻으로 알고 깊이 섬기게 해달라고 구한 바 있다.
그 후 잠시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정말 거짓말처럼 38세의 남자 환우가 그의 어머니와 진료실을 찾았다. 태어나면서 근긴장이상증(dystonia)을 가진 분으로 혀와 오른손이 심하게 강직을 가진 이분은 어려서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시골일을 도우며 자라온지라 의료혜택을 받을 기회가 적었다. 또 가본 병원 마다 별 방법이 없다는 말만 들어왔다가 우연히 마을 주민의 나를 소개하여 방문하였다고 했다. 다행히 이런 분에게 적합한 보툴리늄 톡신 주사라는 최신 근긴장 이완치료 방법이 있었다. 정말 놀라운 점은 그 전날 요청하지도 않은 보툴리늄 톡신 주사가 제약회사에서 기부형태로 좋은 일에 써달라며 내게 뜬금없이 전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딱 이분에게 필요한 정도의 약품 용량이었다.
당시 나는 이 사건이 주님의 명령임을 확신하였다. 정성을 다해 시술을 하고 환우를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그의 오른손은 거짓말처럼 펴져 있었다. 이 일을 통해 가족은 물론이고 어려서부터 이 분을 지켜봐 시골 온 동네 사람들이 놀라고 같이 기뻐하는 놀라운 일이 있었다고 했다.
특히 이 일은 의사의 삶을 살던 내게 내 진료에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간섭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주는 강렬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을 지금까지 깊이 오해하고 있었음을 나는 깨달았다. 솔직히 나는 그 사건을 그저 대학병원 교수였던 엘리트가 시골의 선천적 근긴장이상을 가진 소외된 장애우에게 시혜를 베푼 일로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지했지만 그 안에 나의 시답잖은 우월감을 만끽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반성이 내게 갑자기 다가왔다.
그리스도가 내게 이해하길 원하신 것은 환우의 회복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 환우가 아닌 바로 죄인이자 병자인 바로 나에게 내미신 그 분의 손길이었던 것이었다. 나 같은 죄인을 향한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로의 초대를 깨닫지 못하고 들떠있던 내 부끄러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예수는 그림처럼 제자들과 유독 한 병자에게만 다가가 여쭈시면서 그의 거룩한 손을 내미셨다. 단 한 사람에게 내미신 그 손의 의미는 바로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와 감격의 순간이어야만 했다. 이 사건은 더 이상 성경이나 에피소드 속의 일이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내가 바로 그 혈기가 마른 병자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을 통해 내게 그분이 은혜와 긍휼의 손을 마치 내게 다시 내미시는 듯 했다. 이 그림 앞에서 난 가슴이 얼어붙어 미술관 내에 있던 소파에 몸을 털썩 기대고 한참을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한복음 5:8’
그리고 그 분이 다시 말씀하셨다. 이제 그 깨달음으로 일어나 다시 걸으라고 말이다. 네 걸음이 네 능력이 아닌 내가 준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시는 듯 했다. 네가 만나고 네게 맡겨진 병자를 내가 네게 했듯이 긍휼과 은혜로 섬기라며 내 복음과 사랑의 통로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듯 했다.
나는 말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그 날은 내 휴가의 마지막 날이었으며 몇 시간 후 나는 귀국비행을 앞두고 있었다. 이 한마디 말씀을 하시려고 이 먼 영국 땅까지 나를 이끄신 그의 섭리 앞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그림을 내 영혼에 깊이 새겨 환우 돌보는 일에 지치고 어려움이 생길 때 마다 초심을 되찾는 계기로 삼고 있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나는 여전히 성화나 회화를 대할 때 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또 다른 메시지가 없는지 미술 관람에 늘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여행 중에 하늘을 보며 기도하며 걷다가 크로아티아어로 교회 앞 성경모양 동판에 새겨진 시편 119편 105절 말씀인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를 그 응답으로 받은 적도 있다. 두려워 말고 주의 말씀을 신뢰하라는 그 메시지 앞에 얼마나 깊은 위안과 용기를 얻은지 모른다.
가끔 아내가 내게 묻는다.
“당신은 은퇴하면 뭐가 하고 싶어?”
그러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씩 웃으며 대답한다.
“자유롭게 미술을 보고 즐기고 연구하고 싶어.”
실제로 나는 서양회화에 숨겨진 질병의 묘사를 의학적 관점에서 발견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 기존의 평론가들이 보지 못했던 한 기독의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서양미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접근이 내 남은 생애에 이루어 가고 싶은 화두가 된지 오래이다. 이러한 나의 포부에 아내는 격려는커녕 항상 이렇게 마무리한다.
“당신은 정말 못 말려~!”
탑팀재활의학과 박정욱 원장